자료:혁명적 숙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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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레닌은 룩셈부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소환파와 최후통첩파에 반대하는 당신의 논설은 모두를 아주 기쁘게 했소’, ‘프롤레타리’의 확대 편집 위원회에서 지노비예프는 그녀의 논설을 언급했다: ‘그리고 사실 소환파의 실천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나키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어떤 개인적인 공감이나 반감을 가졌다고 의심받을 이유가 없는, 그리고 날카롭게 소환파와 최후통첩파에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지적되었습니다.’ 이 말에 보그다노프는 답했다: ‘기억하시오, 동지들, 어떻게 멘세비키가 볼셰비키를 아나키스트라고, 쁘띠부르주아라고 고발했었는지. 분명 내가 1904-05년의 레닌과 의견이 일치했다는걸 알 거요. 이번 일은 본의아니게 되었소. 그리고리(지노비예프)는 1904-05년에는 멘셰비키에게 찬동하는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했고, 지금은 당신에게 그렇게 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아주 잘 끌어들였소’

1909년 8월 10일에 룩셈부르크는 티슈카/요기헤스에게 그녀가 ‘그 보고서를 흝어보았다, 전부 다 읽는다면 누구든 불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이 이 다툼에서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게 타타르-몽골식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고리키와 다른 사람들이 소환파에 대한 내 논설 때문에 우리에게 화나지 않았다는 것은 첨부된 보그다노프의 편지로 증명된다’고 썼다.(룩셈부르크는 티슈카에게 보낸 보그다노프의 1909년 8월 7일자 편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혁명적 숙취(1909)

로자 룩셈부르크

1906년 4월

I

역사는 프롤레타리아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지금, 분열되지 않은 반혁명적 폭력의 지배 아래에서 광범위한 대중의 공개적인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혁명적 활동이 다시 지하로 몰려났을 때, 프롤레타리아의 사회민주주의 대표들이 국가두마에 참여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마지막 남은 강력한 ‘합법적’ 기둥이다. 두마의 연단은 많든 적든 간에 공개적으로 이 투쟁의 슬로건들을 공표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연단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프롤레타리아의 마지막 남은 합법적인 대표단조차 아직 그 임무를 최고조로 수행하고 있지는 않다. 즉 사회민주주의 의원단은 매우 자주 실수를 하며, 두마의 연단은 계급투쟁의 원칙에 대한 조직적인 지지를 위해, 모든 부르주아 정당과 그들의 반혁명적 게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위해, 노동대중의 정치적 계몽을 위해 능률적으로 사용되는 대신 프롤레타리아 대표들의 우유부단한 행동과 동요의 무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동요는 지속적인 정치적 노선이 없으며 때때로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요구와 전면적으로 배치된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사실들을, 배경으로 더 깊게 파고들지 않고 ‘표면에서’만 평가한다면 현재 사회 민주주의의 두마 대표단은 아주 암울한 상태에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유익하다기보다는 값싼 진실만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의 징후적 중요성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의 결과, 즉 우리의 두마 대표단의 나약함이 당의 대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 의원단의 소환을 이 암울한 상황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주장하는 조류를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제 3차 두마에서 의원단의 활동은 그것이 계급 투쟁의 무기로 적당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의원단을 소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몇몇 러시아 동지들은 분명히 이 마음을 뒤흔드는 단순성과 직접적인 정치적 추론을 이 문제에 있어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단호함과 견고함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좋든 싫든 간에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그런 단순화된 사고방식으로 졸아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그리고 모든 경우에서 가장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더 깊은 분석과 변증법적 상호관계에 대한 해부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 바로 그 안에 사회민주주의가 경험한 고난의 진정한 원인이 있으며 또한 그 고난의 탈출구를 향한 진정한 길이 있다.

제 3차 두마의 사회민주주의 의원단 활동에 대한 문제는 두가지 측면, 즉 의원단의 인적 자질, 의원단 활동의 부적절함의 측면과 제 3차 두마에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실천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 객관적 조건의 측면에서 고려해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관점에서 고려해보자면, 의회 의원단의 인적 구성이 부르주아 정당들과 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 따라서 이 둘은 의회주의 일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부르주아 정당들에서는 정치 투쟁은 사전에 정해진 입법 절차의 경로를 통해, 그리고 정부 직책들을 차지하는 것으로 행해지며 의회는 정치적 변화의 전체 과정이 집약되어있는 정치 투쟁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의원단의 개인적 성취와 실패는 그들에게는 정부나 다른 정당들과 하는 협상에서, 무규율적인 결합과 금전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성공을 쫓을 순간을 찾는 데서 그 기준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 부르주아 의회는 개인적 자질이 있는 정당 지도자들을 위한 훌륭한 전장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요소는 그것의 순수하게 ‘유물론적인’ 환경에서 그 한계를 만나기도 한다.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개인적 자질이나 의회 지도자들이 당의 능력이나 무능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나라에서 그 당의 일반적인 정치적 위치, 그 당의 영향력이나 약점, 그 당의 계급적 특성과 그에 연결된 그 당의 정치의 일반적 방향이 그 당의 의원들의 자질이나 자질의 결여를 위한 전장을 만든다. 그러므로 독일 가톨릭 중앙당에서 비스마르크에 의한 가톨릭교도 탄압의 시대에 중앙당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루트비히 빈트토르스트[Windthorst]의 교체 다음에는, 에른스트 리베[Lieber]와 카를 바켐[Bachem]이라는 한 쌍이 등장했다, 그러고 나자 중앙당 그 자체가 우익 반동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므로 투쟁하는 당, 반대하는 당이었던 독일 자유주의의 수뇌부에는 한때 야콥 마우필론[Mauvillon]이라는 강력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블록’ 정치의 수준으로까지 깊게 부패한 오늘날의 자유주의의 독일 의회 수뇌부에는 이미 전적으로 익명인 범속한 인물의 무리가 서 있다. 다른 쪽에서는, 러시아에서는, 카데트 당[입헌민주당]이 갖추고 있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한 의회적 자질들이, 이 희비극적으로 쓸모없는 당의 내적 약점과 파산 때문에 그 당의 가련한 위치를 더더욱 강조할 뿐이다, 두마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이 조잡하고 이념적으로 문맹인 블리다미르 푸리시케비치[Purishkevich, 검은 백인단 지도자]인 반면에 말이다.

그 문제는 프롤레타리아의 당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의회 활동을 계급투쟁의 무기 중 하나로만 보면서, 프롤레타리아는 우선 노력의 방향을 작은 입법적 개혁의 형태로 때때로 즉각적인 성공을 달성하는 데 돌리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과제를 설명하는 데 돌린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의원단은 이런 식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선진층의 정치적 의식의 반영일 뿐이다, 그리고 의원단의 활동은 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지적 내용을 무엇이 구성하는지 더 충분히 그리고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전달할수록 더 완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 명의 의회 의원의 개인적인 중요성과 자질은 부르주아 당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덜 결정적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의회 전술은 어떤 개인적이고 갑작스러운 임기응변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계급투쟁의 원칙적이고 전술적인 기반의 틀에서 사전에 결론이 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대표, 즉 사회민주당에 의해 모든 나라에서 공식화된다.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은 그러므로 그들의 임무 그 자체에 의해서, 노동 대중의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층의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참여와 통제 아래 있는 동일한 프롤레타리아의 당 전체에 의해 수립된 전술의 대변자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회 활동에 대한 재능의 많고 적음에 관한 이차적인 문제에서 독립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의원들 전체의 전술은 다른 모든 부분에서 또한 그런 것처럼 전체 본질상 이 의원들의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오직 당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의회 전술은 40년이 지난 오늘날 전통과 단단하게 수립된 당의 대오의 객관적인 의견의 힘으로 거의 관례가 되었으며 지금도 어떤 의원들에게도 거의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확신의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런 사전에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에게 그들이 따라갈 필연적인 선을 미리 운명짓는, 당의 의지와 합치된 전술의 확고함은 오직 두가지 조건, 즉, 정치적, 계급적 상황의 확고함, 그리고 내부에서 단결된 강력한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당의 원칙에 의거한 확고함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지금까지 두 조건을 달성한 고전적인 예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밀랑 위기[Millerand, 1899년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의 시대의 프랑스 사회주의는 그만큼 반대 사례, 즉,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의 당의 내부의 조직적, 지적인 불일치가 즉시 사회주의 의원들에게, 그리고 그 기관중 하나라고 그 의원들이 칭해지던 그들의 당 자체로부터 사회주의 의원들이 고립되고 소외되는 것으로, 반영되어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예로 자리매김한다. 양쪽 예 모두 그곳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의회전술의 본질 자체가 솟아나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증시켜준다. 그 본질이란 정확히 그 단순한 사실, 즉 모든 사회주의 정당은 -외적, 내적 조건의 힘에 의해- 그들이 받아 마땅한 의원단을 가진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두가지 근본 조건 모두가 사회민주주의의 노련한 의회전술을 펴는 데 있어 아주 문제적이다. 제 2차 두마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의회활동이 대중의 혁명적 고조의 마지막 물결들 이후에도 아직 비교적 고도로 수행되었다고 한다면 이 물결들이 자츰 잦아든 후에는 슬픈 상황이 완전히 명징하게 드러났다. 반혁명의 포위와 계급들과 정당들의 힘의 상호관계의 지속적인 변화로 만들어진 불안정한 정치적 균형, 그 중에서도 제 3차 두마의 자신을 입법 부르주아 의회로도, 혁명적 전복의 무기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완전히 특별한 성격은 어떤 본을 적용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고, 특히 어떤 의회적 전통도 부재한 러시아에서는 매 걸음마다 계급투쟁의 일반적 원칙과 과제를 고유의 조건에 적용하는 데 있어 독립적인 독창적 노동을 요구한다. 이런 빛에 비춰 그런 독창적인 노동이 오로지 이 프롤레타리아의 당의 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으나, 러시아에서는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당의 전기는 이런 면에서 볼 때 결점의 연속이었다. 반혁명의 백색테러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대중이 그들의 두마 대표자들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하고 응집력있는 중핵이 부재할 뿐 아니라, 당장 존재하는 그 조직의 요소조차 근본적으로 끊임없고 경솔한 내부 투쟁으로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 몇몇 동지들은, 언론을 믿을 수 있는 한, 당을 청산하려고 공개적으로 노력하는 데 다다르기까지 했다. 두마 의원단의 당의 최고기관인 중앙 위원회에 대한 불복종에 뼛속까지 분개하고 있는 러시아 동지들은 동시에 이 당의 최고 기관이 조용히 이 당의 기관들에서 공식적인 당의 단결과는 반대로 그리고 그것을 조롱하면서, ‘당의 공식 기관들을 쥐고 흔드는 개인들의 서클’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감내하고 있다. 이런 틀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공개적이고 집요한 당 전체에 대항한 분파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두마 전술의 문제는 분파투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당의 한 부분은 당의 다른 부분의 그렇게 철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대표단들의 행위를 방어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여긴다. 이 동지들은 명백히 얼마나 그들이 모순에 빠졌는지, 커다란 이상함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확히 동일하게 6-7년 전에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의원들을 당의 원칙의 근본적 개변과 당 기구에 대한 계속되는 불복종으로 끊임없이 고발했던 것이 프랑스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대오 사이의 기묘한 조직적 이념적 불일치의 전도된 반영이었을 뿐이었던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최후통첩’으로 두마 의원단을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이 러시아 동지들의 조언 또한 그렇다, 이 조언은 당이 고골의 작품에 나오는 장교의 부인 역할을 하라는 것, 즉 자신을 채찍질하라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개괄적인 상태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물론 특별한 통찰력은 필요 없다. 그 조직적 불일치는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구속하고 그들의 당의 삶의 정상적인 형태와 기능을 왜곡시켜온 현실의 반혁명 체제가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의 전반적 상태로 인해 분파 투쟁 또한 심각하게 계기가 심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이렇다면 ‘최후 통첩’으로 두마 대표단들을 교정하길 원하는 동지들은 이 무시무시한 최후 통첩을 현재 사회민주주의가 의회 의원단을 그 자연스러운 역할인 의식적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들린 순종적인 무기로 격하시키는 것을, 노동계급의 강하고 단결된 조직으로 만드는 것을 막는 러시아의 사회적 생활의 이런 객관적 상태에 대해 적용해야 한다.

II

두마 의원단을 소환하자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의원단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반면에 제3차 두마 전반에 관련한 프롤레타리아의 전술적 임무에 대한 크게 다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생각의 지지자들, 즉 모스크바와, 또한 상트페트르부르크의 ‘소환파’가 정식화한 결의안은 계급투쟁의 원칙의 정신을 선동할 연단으로 제 3차 두마를 활용하는 것이 외부 조건의 힘에 의해 완전히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되었고 그러므로 ‘야기된 상황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이 두마의 진정한 성격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혁명적 전술을 강조할 사회민주주의 대표단의 하야’라는 시각을 표현했다. (no. 5 Rab. Znameni, republished in no. 39 of Proletary에 실린 소환파의 논설을 보라.)[1]

이런 식으로 주어진 사회민주주의 대표단의 활동의 평가에 대한 부분적인 질문이 전술에 대한 훨씬 더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의 영역, 의식적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두마 보이콧이라는 영역으로 바뀐다. 사실 두마 대표단의 소환은 최소한 6월 3일의 선거법이 존재하고 두마의 세력이 그것에 부합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논리적으로 두마 보이콧으로 졸아든다. 보이콧과 단순히 사회민주주의 대표단이 두마에서 퇴장하는 형태의 보이콧은 현재 제 3차 두마에서 군림하는 반혁명에 대항한 유일한 진정으로 ‘혁명적인 전술’로 권해지고 있다. 이 최신의 ‘혁명성’의 발명은 독창성에서 뛰어나지도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의 저자들에게 깊게 생각하는 수고를 끼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프롤레타리아 ‘급진주의’의 최신 레시피는 제 1차 두마 선거의 시대에 적용되었고 제 2차 두마 선거에서도 그 매력을 잃지 않았으며 제 3차 두마 선거의 전야에는 몇몇 동지들만이 방어하던 두마 보이콧 슬로건의 단순한 재발화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 상황은 순식간에 프롤레타리아의 전투적 전술의 적합성을 생생하고 유연하게 현실적으로 통찰할 노력이 없는, 잘 알려진 짧고 메마른 공식에 입혀진 순수하게 외피를 입힌 것에 불과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성에 대한 그런 단순화되고 통속화된 이해의 새로운 예가 되었다. 모든 가능한 상황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슬로건으로써 보이콧 그 자체는 특별히 혁명적인 것은 무엇도 뜻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히 반대 성격의 표명일 수도 있다. 1848년 혁명의 시대에 독일에서 무력하고 모호하고 비겁한 자유주의 부르주아가 반년의 경과 후에 11월 1일에 퓔[Pfuel] 내각의 교체와 공개적으로 반동적인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봉건적 내각의 수립이 동반된 정부의 노선 전환의 형태로 피할 수 없는 종막에 도달했을 때, 수뇌부 없는 국민의회는 전제주의의 노선 전환에 대응하여 ‘수동적 저항’의 형태로 정부에 대한 보이콧을 선포했다.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출판된 신 라인 신문은 즉시 라인 주에서 이 부르주아의 슬로건에 대한 평형추[반대급부]로, 국민의회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 납부의 거부에서 혁명적 공안위원회의 수립까지 일련의 능동적 수단이 필요함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반혁명 당국이 이 위원회들의 수립과 공식적 활동을 힘으로 좌절시키려 한다면, 힘에는 모든 종류의 힘으로 대항하여야 한다. 수동적 저항은 능동적 저항을 기초에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송아지의 백정에 대한 덧없는 저항과 유사할 것이다.’[2] [Neue Rheinische Zeitung, No. 147, 19 November 1848] 다른말로 하면, 마르크스는 독일 부르주아에 의해 선포된 수동적 보이콧을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능동적인 참여와 거리 혁명을 야기하는 일련의 수단으로 즉각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1848년의 독일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거리에서의 독립적인 전투를 전제주의와 그것에 연결된 봉건주의 당보다 아직 훨씬 더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대중의 개입에 호소할 이유가 없었고 ‘수동적 저항’의 구호에 머물렀으며, 정확히 그 때문에 전제주의 앞에 항복하였다. 그렇게 마르크스의 11월의 외침은, 1848년 혁명에서 그의 정치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광야의 목소리로 남았다. 어떤 혁명적 행위도 반혁명적 도발에 대응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독일 부르주아의 ‘수동적 저항’은 항상 그렇게 끝났던 것처럼 ‘송아지의 백정에 대항한 덧없는 저항’으로 끝났다. 자유주의 송아지는 백정-전제주의에게 목이 잘렸다.

그러나 부르주아 자신에게도 수동적 저항은 능동적, 전투적 저항과 동조할 때만 정치 투쟁의 실제적인 수단이 된다는 사실이 계속 비밀로 남지는 않았다. 그들의 계급 이익이 그들에게 이 사실과 그들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적개심의 정도를 상기시켜줄 때 그들은 이 모든 경우에서 1848년의 마르크스주의 슬로건의 정신에 동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우리는 체코 민족주의자들의 역사에서 정치 투쟁에서 수동적 저항을 적용하는 것의 또다른 역사적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제국의회를 15년의 기간동안 보이콧해왔다. 1860년대 초반 마젠타 전투와 솔페리노 전투[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에 의해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한 전투들]에서 호되게 당한 오스트리아 전제정은 ‘법적 질서’의 길로 선회하기로 결정했고, 슈메를링[Schmerling]의 중앙집권주의 헌법을 흠정했다. 연방주의 체제를 요구하던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1863년에 보헤미아 지역의회[Landtag] 의원들 중에서 빈 중앙 제국의회로 보낼 대표를 뽑는 것을 거부했고 이 입장을 타페[Taaffe] 장관이 더 폭넓은 양보를 하지 않는 한 1878년까지 고수했다. 진실로 그들의 반동적 연방주의 이상은 단지 실현되지 않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발전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 유토피아의 영역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역의회의 새로운 선거법, 그들의 체코 언어를 의무적으로 보헤미아에서 정부 언어로 인정하는 것, 체코어 대학들 등의 형태로 훨씬 더 실제적인 유토피아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체코인들의 정치는 그 시절에도 전혀 단지 빈 의회에 대한 보이콧 하나로 졸아들지 않았다. 일단 그 보이콧이 선포되자마자 그들은 전국에서 가장 폭넓고 격렬한 선동을 개시했다. 계급 모순을 모호하게 하는 민족적 속임수의 편리한 깃발 아래 끓어오르는 대중의 집회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체코인들은 모든 힘으로 그들의 ‘의회에서의’ 수동적 저항을 들뜬 대중의 능동적 저항으로 떠받혔으며, 1868년 포위 상태의 보헤미아에서, 1870년대의 셀 수 없이 많은 체포와 경찰과 군대와의 유혈 충돌에서, 1880년대의 새로운 충돌의 연속에서, 체코인들이 다시 무장 활동을 재개했을 때, 그 구성원들이 ‘음모’ 혐의로 혹형을 선고받은 소란스러운 ‘옴라디나[Omladina]’ 재판에서, 마침내 1897년의 프라하에서 포위 상태가 선포된 것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이 인구의 넓은 범위에게서 지지받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된다. 체코인들은 당연히 앙상하고 반동적인 민족주의 슬로건의 이름으로 혁명을 야기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위해 의회에 대한 수동적인 보이콧을 전국적인 능동적 저항으로 변모시키는 데는 완전히 성공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에서는 그것의 본성 자체에 의해 대중의 자발적 행동이 미리 예견된다, 의회 보이콧 자체는 능동적인 대중 투쟁의 에피소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다수파에 의해 그 시절에 선포된 제 1차 두마의 보이콧을 그것이 보이콧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가장 뛰어난 혁명적 전술이라고 보고 이 전술을 어떤 순간이든, 심지어 1909년에조차도, 부활시키킬 원하는 동지들의 의견은 보이콧을 의회주의의 신성한 교의에 거역하는 대죄로써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부정하는 굳건한 보이콧의 반대자들과 완전히 같은 영역에 서 있는 것이다. 양쪽 모두 두마에 대한 보이콧이 기초적인 의무이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명예이기조차 했던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을 완전히 시야에 넣지 못하고 있다.

1905년 한 해 전체는 시작부터 끝까지 대중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시기였고 동시에 단계적으로 점점 쇄도하는 혁명의 물결의 시기였다. 1월 9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 의해 주어진 신호에서 시작해 혁명의 수로는 지속적인 대중 파업의 연속, 육군과 해군의 봉기, 10월의 총파업, 그리고 모스크바 봉기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넓어진다. 가차없는 혁명적 투쟁의 발전은 그 내적 논리의 빠르고 활기찬 발전에 부합했다. 혁명의 제 1기의 주요 무기, 즉 총파업을 사용하는 길은 10월에 최고점에 다다랐고, 10월의 나날들에 이 무기의 실제 효과가 떨어져가고 그 자신의 한계를 맞닥트리지만 대중 투쟁은 이런 일시적인 장애물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프롤레타리아의 대중 투쟁 그 자신의 변증법의 힘은 가속되어 새롭고 불가피한 결말, 공공연한 투쟁을 향한다. 모스크바 봉기, 이것은 한 측면에서는 제 1기의 비효율성에 대한 혁명 자신의 비판이었고, 다른 측면에서는 더 높은 제 2기를 향한 이행, 전제주의에 대항한 예행적인 무장 행동에서, 혁명의 발전에 대한 혁명 그 자신의 해명을 통해, 투쟁의 진정한 고르디우스의 매듭, 즉 정치 권력을 쥐기 위한 결전을 향한 이행이었다. 상트페트르부르크의 1월 9일의 봉기가 혁명의 첫번째 시기의 신호였던 것처럼 모스크바 봉기는 시작이었으며, 두번째 시기의 슬로건이었다. 혁명이 1월에서 10월까지 계속된 파업의 영역을 거쳤던 것처럼 혁명은 구권력과 치르는 공공연한 시가전의 영역에서 넓고 깊게 발전하는 더 나아간 단계들을 완전히 거쳐야 했다. 마찬가지로, 상트페트르부르크 파업들이 우레처럼 확장되어 러시아 구석 구석을 휘어잡는 전반적 경제 투쟁의 폭풍이 된 것처럼, 모스크바 봉기 또한 도처에서 봉기의 연속으로 확장되고 성숙하여 서로 합쳐져 마침내 그 사건들의 논리적 힘에 의해 공개적인 투쟁을 위한 노동계급의 총봉기가 혁명의 이유를 끝내버렸어야, 즉 구권력을 파괴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기반을 닦아야 했다. 모스크바 봉기는 혁명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견실하게 그 목표를 향해 분투할 수 있도록 다른 봉기들의 연속을 위한 신호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고립된 모스크바 봉기 그 자체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승리로 끝날 수 없었으며, 또한 전체적인 혁명의 운명에서 차지하는 모스크바 봉기의 역사적 역할은 그것의 직접적인 외관상의 성공과 별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나온다. 1월 9일의 피비린내나는 외관상의 패배는 이 사건이 거대한 혁명이 탄생하는 순간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모스크바 봉기의 패배를 혁명의 새로운 공격적 운동의 신호로, 또는 전제주의에 의한 혁명적 시기의 청산의 신호로 전환시킬 것인지가 12월 위기 후에 프롤레타리아 앞에 놓인 질문이었다. 이것에 대한,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응답들이 그 이후의 혁명의 운명을 몇년동안 결정했고, 그 순간은 전체 혁명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제 1차 두마의 소집은 그런 의미에서 혁명의 쇠퇴를 선고하는 대답이였다. 당시 인민의 대의와 입법 의회를 흉내내던 두마는 정치 권력 전체가 사실상 전제주의의 손에 남아있고 이 힘을 빼앗으려던 첫번째 시도가 막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로 끝났을 때는, 본질적으로 반혁명 측의 책략, 구체제가 느긋하게 파괴적인 포대를 조준하고 대오를 좁힐 수 있는 요새일 뿐이었다. 두마의 소집을 허용하는 것, 그것에 손을 거드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그 자신의 손으로 청산의 기간을 공개적으로 돕는 것, 부분적인 패배를 전반적인 패배로 파묻는 것, 적의 모스크바 봉기에 대한 승리를 혁명에 대한 승리로 전환시켜 주는 것, 혁명적 투쟁의 발전을 멈추고 모든 전선에서 퇴각하는 것을 뜻했다.

싸우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앞에서 가는 전위의 역할을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야 ‘역사가’로써 그 자신의 운동에 대해 서술하는 훨씬 더 편안한 역할과 혼동하는 정치인들은 무진장한 승리감에 싸여 모스크바 패배 이후에 이어지는 사실들이 더 이상의 대중 봉기의 확산에 대한 희망이 무용하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 당시 혁명의 직선적 발전의 선은 넝마가 되버렸음이 증명되었다, 혁명은 오랜 기간 동안 매장되도록 운명지워졌고 행동의 방식과 운영 원리는 사회적 삶의 궤도로 후퇴했다, 그리고 여기서 거대한 힘으로 계급 분화의 작업과 미래의 분화를 위한 새로운 자료의 축적이 시작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전환을 격퇴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이런 저런 전술의 힘에 달린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이 사실, 혁명 군대의 전위가 투쟁이 앞으로 발전해가는 내적 논리와 조건을 완전히 정확하게 평가하고 전환점에서 그 전환이 사건들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을 늦추려고 그것에 달린 무슨 일이든 했다는 것, 혁명적 발전이 전반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한 그런 상황을 최대한 가져오기 위해 싸웠다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혁명이 쇠퇴했기 때문에만, 그 자신의 눈으로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만 후퇴했으며 사전에 현명하게도 패배를 선견하며 예상하고는 무기를 내팽겨치지 않았다는 것, 이 사실은 ‘폭풍의 시기’의 역사의 페이지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전술의 빛나는 증거 중 하나가 되며 아마도 그 이후의 제 1차 두마와 그 해산 후에 저질러진 오류들을 부분적으로 메워준다.

이런 것이 제 1차 두마 보이콧의 내적 의미이다. 그것의 혁명성은 이 투쟁 수단의 말하자면 기술적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 순간의 총합에, 보이콧이 외적 표현으로 쓰일 뿐인 정치적 내용에 있다.

그러므로 제 1차 두마의 해산 후 혁명의 쇠퇴가 짧은 에피소드가 아닌 길고 우울한 지층이라는 것을 관찰할 수 밖에 없었던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선진층의 낙담한 감정도 이해할 만 하다. 대중적 혁명 투쟁의 시기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전경에서 치워놓은 제 1차 두마의 자유주의 캠페인이 완전한 재난을 맞은 후에 자연스럽게 솟아올랐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가 운영 원리를 바꿀 불가피한 필요성을 보고 전선의 변화, 즉 선거 참여를 단호히 촉구했을 때, 이 슬로건이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대오 사이에 영감이 아니라 낙담과 당황을 불러일으킨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목청 큰 혁명적 단어 ‘보이콧’에 대한 애정 없이도 예를 들어, 폴란드 프롤레타리아 사이는 제 2차 두마에 대한 아주 저조하게 참여했고 선거 참여는 프롤레타리아 자신에 의한 혁명의 쇠퇴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인정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제일의 의무인 사회민주주의에게 삼 년의 교훈은 헛되이 지나가서는 안된다. 현재, 전체 진화가 주어지고, 러시아의 사회 계급들이 정부의 노선 전환로 주어진 헌법의 틀을 거치고 있고, 지속적인 근로대중의 수동성과 전제주의의 국내외 정치에서의 입장이 강화된 것을 보고도 더 이상의 긴급한 혁명의 전술적 전선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완전한 돈키호테식 돌진이다. 어떤 진지한 정치도 대중의 전반적인 혁명적 폭발이 다음 몇 주나 몇 달 안에 일어나리라고 계산할 수 없다. 반대로, 시간이 지나갈수록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정치 교육과 조직의 예비 작업을 하며 그 임무가 정점에 도달해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서 혁명의 새로운 발흥의 기회가 무르익을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두마 보이콧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전반적인 전술 노선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프롤레타리아의 전반적 정책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더 분명하다. 지금의 조건에서 보이콧은 접근하는 군대의 첫 일제사격이 아니라 메아리 외에는 뒤따르는 것이 없는 공포탄이다. 이것은 베를린 국회에서의 축복받은 추억 식의 전형적인 ‘수동적 저항’이다. 현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 의원단의 소환이라는 슬로건을 채택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전술’이 아니라 비겁한 부르주아의 서툰 전술, ‘송아지의 백정에 대한 헛된 저항’이다.

한가지 더의 측면이 검은 백인단 두마의 보이콧이라는 슬로건에서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에게 선전활동을 위한 공간을 주지 않는 두마의 치밀한 반혁명적 성격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타우리데 궁의 존엄한 의회의 성격과 내용은 그것의 반혁명성이라는 적나라한 사실로 인해 없어지지 않는다. 결정적인 환경은 제 3차 두마가 이미 정부의 패거리의 반혁명 기관이 아니라 러시아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반혁명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현재 러시아의 ‘의회’의 역사적 중요성이 놓여있으며 그러므로 이 ‘의회’에도 그 조건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 것이든 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가져올 필요성이 단숨에 나온다.

III

두마 의원단의 소환이라는 구호에 있는 가장 중요한 그리고 아마 특히 전술적으로 잘못인 것은 전반적인 심리적 배경이다, 그리고 이 슬로건은 또한 그것을 기반으로만 가능해진다. 우리 당의 대오의 이 조류, 이런 소음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소환파’라는 이름이 붙여진 조류의 뿌리 그 자체에 의식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미래와 혁명의 재개와 승리에 대한 객관적인 보장에 대한 불신이 있다. 이런 이념적 동요만이 인공적으로 발명된 곤란한 ‘혁명성’ 슬로건에 대한 요구를, 모험적 경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조용한 굳건함으로 프롤레타리아 대중 사이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선동을 하기 위해 스톨리핀 정권과 전 러시아 반혁명 클럽, 즉 제 3차 두마의 매 걸음에 의해 매일 제공되는 본래 그대로의 자료를 사용하는 대신에 말이다. 이 조류는 혁명적 정신의 수치스러운 쇠퇴의 표명으로써 전체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가장 단호한 거절을 받아 마땅하다.


출처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9/04/hangover.htm

First translation of “Революционное похмелье”, Proletary, No. 44, 8 (21) April 1909, pp. 3–6.

Article in Russian: https://www.mediafire.com/?o8uomwjvb70svbs.

Translated by Noa Rodman.

Copied with thanks from the Libcom.org Website.

Marked up by Einde O’Callaghan for the Marxists’ Internet Archive.

  1. Lenin’s response to this article: Two Letters
  2. A Decree of Eichmann’s. First published in the Neue Rheinische Zeitung, No. 147, 19 November 1848. ‘Er gleicht sonst dem Sträuben des Kalbes gegen seinen Schläch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