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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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다른 이름
로잘리아 룩센부르크
Rozalia Luks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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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포고령으로 선포되거나 도입될 수 없다.
출생
🇩🇪 독일

개요

로자 룩셈부르크폴란드 태생의 정치인, 경제학자, 철학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생애

러시아 제국 치하 폴란드 입헌왕국 시절

그녀는 1871년 3월 5일 자모시치에서 엘리아스 룩셈부르크와 리나 룩셈부르크 슬하의 막내딸(2남 2녀)로 태어났다. 자모시치는 당시 인구 7천여명도 안되는 성채도시로서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령 국경도시였으며, 자모이스키(1541~1605) 재상 덕분에 1558년 유대인들이 거주권을 얻으면서 전체 자모시치 인구의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는 엄격한 종교적 율법을 신봉하는 하시딤파와 계몽철학의 자유로운 가치를 신봉하는 하스칼라파 라는 두개의 큰 집단이 존재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의 집안은 어느 유대인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의 집안은 1873년 바르샤바로 이사갔다, 룩셈부르크 집안의 분위기는 당시 자모시치에서 지배적이었던 하시딤파와 맞지 않았고, 유대인 공동체와 이별하고 아이들에게 질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었던 엘리아스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12살 즈음 되어 폴란드 제 2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여러 산발적인 저항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1881년 3월 1일 차르가 암살당하는 큰 사건이 터지고, 1883년 4월에는 '프롤레타리아'그룹이 폴란드 전역에 연속적인 파업을 일으키는데 성공하는 등 여러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속 그녀는 15살에 '프롤레타리아 당'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당시 '프롤레타리아 당'은 탄압당해 해산당한 뒤 두번째로 결성된 조직이었다, 그녀의 활동은 목숨을 걸어야했고 그녀의 동지들은 하나 둘 씩 사라졌고, 경찰들의 수사망을 조여오자 조력자 중 한명이었던 마르틴 카스프자크의 도움으로 1889년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 진학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를 뤼베크 부부가 사는 집의 방 하나를 빌려 살면서 스위스의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 신문교정작업을 하거나 동료 사회주의자들과 토론과 논쟁을 하는 삶을 보냈으며 그녀가 진학한 취리히 대학에서는 철학과에 등록한 뒤 수학, 식물학, 동물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전과하여 법학과에 등록한 뒤 공법, 경제학,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후 그녀는 '폴란드의 산업 발전'이라는 논문으로 사회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이시기에 그녀의 연인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다, 요기헤스는 당시 지하운동가로서 사회주의자 그룹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곧 두사람은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 사귀었으나, 로자와 레오는 연인관계 사이에서 우선관계 설정에 대해 미묘한 다툼이 존재했다.

첫 인터네셔널 대회

당시 망명한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폴란드 사회당(PPS)를 중심으로 재조직 되고 있었다. 폴란드 사회당의 강령은 폴란드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명시하고 인터네셔널 내에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권위를 행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에서 차르에게 붙은 폴란드인과 착취받는 폴란드인 전체를 억압받는 계급으로 보고 모든 폴란드인들의 단결을 촉구하는 분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로자에게는 차르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착취당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들의 연대가 필요했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연인 레오와 함께 몇몇 폴란드인을 조직하여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를 창당한다. - 이후 리투아니아인들과 연대하며 1900년에 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이 된다 -

그녀는 레오 요기헤스가 창간한 폴란드어 신문 <스프라바 로보트니차(노동대의)>에서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글들을 써내려갔으며 1893년 8월 6일 취리히에서 열릴 예정인 사회주의 인터네셔널 제3차 대회에서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을 옹호하기위한 준비에 정신없었다.

폴란드 사회주의 그룹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권위를 인정받는데 실패했지만, 이 무대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적수들과의 다툼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의 얼굴이 된 로자는 자신과 당을 향한 온갖 공격에 맞서 싸워야 했다. 레오 요기헤스는 지하 운동가였으며, 당에서 온갖 정치적 공세와 논쟁을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을 지닌 이는 로자 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율적인 의식을 습득하고, 부르주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의 다른 계층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1]

1895년이 되어선 그녀의 첫작품이 나오는데 <독립 폴란드와 노동 대의> 라는 작은 팜플렛이었다. 그녀와 의견이 상충되던 폴란드 사회당은 이에 응수해 그녀에게 갖은 인신공격 - 반유대주의 - 을 쏟아부었다.

1896년 7월 17일 런던에서 열릴 인터네셔널 대회가 다가오자 그 공세는 거세졌다. 빅토르 아들러가 지적한 것 처럼 "폴란드 문제가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날카롭게 부각되는 것"을 두려워했다.[2] 폴란드 사회당은 로자의 동지 중 한명을 '오크라나'의 첩자라는 거짓소문을 퍼뜨렸고 러시아에서 망명할때 그녀를 도와준 마르틴 카스프자크 마저 그들의 모략에 빠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에 그녀의 주장에 힘을 실기위해 카를 카우츠키가 발행하는 <노이에 차이트>에 글을 발표하고자 했다. 당시 <노이에 차이트>는 독일 사민당의 후원아래 국제적인 권위를 부여받았고, 카를 카우츠키의 주도하에 온갖 국제 사회주의의 경향들이 모여든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제 1차 세계대전

독일혁명과 죽음

저작

각주

  1. 막스 갈로, 푸른숲,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2002, 118쪽.
  2. 막스 갈로, 푸른숲,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2002, 119쪽.
  3. 사회주의노동자연합(2008~2011) 문서고에 PDF형식으로 업로드 되있다.
  4. 해당 저작의 번역본은 국제공산주의흐름(ICC),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