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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에서 세계 1차대전까지

프랑스

파리 코뮌이라는 일대 비극을 겪은 후,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엄청난 타격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을 짓밟고 세운 티에르의 제3공화국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1873년 왕당파들과 보나파르티스트들이 공화국에 반대하며 티에르[1]를 불신임 결의하고 왕당파인 막마옹이 대통령 직위를 차지했으며, 왕당파의 수괴 브롤리가 총리 직위에 올랐다[2].

뒤이은 10월 총선 역시 왕당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다[3]. 그러니 왕당파들은 입헌군주주의적인 오를레앙파들과 전제군주파, 보나파르티스트 등으로 사분오열하여 왕정복고를 이루지 못하고 1875년 온건 공화파들과 오를레앙파들 사이 동맹이 이루어져 단 1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공화제적인 헌법이 제정된다.

제3공화국 헌법이 제정된 후 사회주의자들은 침묵에서 벗어나 1876년과 1878년 연달아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고[4] 브루스파[5]를 중심으로 1879년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정당연맹, 일명 FTSF가 창당되게 된다. FTSF는 이전 대회들의 협동조합주의적 경향을 넘어서서 집산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이후 1880년 줄 게드[6]가 마르크스와 협력해 최소강령을 채택하게 된다. 또한 에두아르 바이양[7]등의 블랑키주의자들은 중앙혁명위원회, 일명 CRC를 창당한다.

그 해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이로인해 사회주의자들간에는 내분이 발생한다. 줄 게드나 폴 라파르그[8]등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브루스파의 가능주의적 성향에 반발하였고, 이에 브루스파들은 그들을 추방하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랑스 노동당, POF를 창당한다.

1884년 발덱-루소 법은 노동조합의 설립을 합법화했고, 곧 543개나 되는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설립되었다. 1886년 프랑스 노동당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조합 조직인 전국노동조합연맹이 출범했다[9]

1885년 선거에서, 장 조레스라는 한 공화파 의원이 당선된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6석을 획득했다.[10]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우파에는 왕당파들-정통파[11], 오를레앙파[12], 보나파르티스트[13]-이, 중도좌파에는 시의주의 공화파[14]가, 극좌에는 급진공화파[15]와 사회주의자들이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급진공화파들은 노동문제 해결과 사회개혁에 관심을 보였고 노동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했는데, 사회주의자들은 부정의의 해결이라는 공동의 대의를 지닌 이 급진공화파들과의 차별점을 두기 위해 계급투쟁 고유의 원리를 실천해야 했다.[16]

이 당시 프랑스 정치계에는 불랑제주의 바람이 불었다. 조제프 불랑제라는 민족주의 성향의 군인이 프랑스에서 단연 인기를 끌고 있었고, 반독일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선전하고 있었다. 우파는 물론이고 급진공화파나 사회주의자들 또한 불랑제주의 대열에 가담했다. 다수의 블랑키주의자들은 그와 동맹을 맺고 혁명적 사회주의자 중앙위원회, CCSR을 창당해 CRC에서 떨어져나왔다. 이러한 돌풍은 곧 가라앉았고 불랑제는 외국으로 도피했으나,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17]

이러한 상황속에서 사회주의자들간의 반목은 커져갔고, 알레망파[18]들은 브루스파의 개량적 행태에 반대하며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 일명 POSR을 창당하며 FTSF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1885년 당선됬던 시의주의 공화파 장 조레스가 1889년 낙선한 뒤,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의원 시절에도 카르모 광산 투쟁 등 다양한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왔다. 그는 공화파 출신 사회주의자로써 공화국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고, 공화파 사회주의라는 고유의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레유 남작이라는 광산 자본가에 맞서 카르모 광산노동자들의 지지아래 1893년 재선된다.[19]

1892년 바이양파 시장인 생투앙 시장의 제안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 시의원 연맹 이 창설되었으며, 이들은 “도시와 공공의 자유를 발전시키고, 노동의 조직과 노동자 보호를 통한 노동자의 해방을 추구하고, 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시정을 현실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20], 공공서비스 영역을 확대하며 누진세의 적용,독점 기업들의 시영화 혹은 국유화를 결의하였 다.[21]

1894년, 오귀스트 바이양(앞서 나온 에두아르 바이양과는 관련 없음)이라는 남자가 의회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려다 연행된다. 의회는 아나키스트들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탄압법을 제정했다. 추후 바이양의 폭탄은 경찰서 실험실에서 제조된 것이 밝혀졌고, 바이양의 수양딸은 불랑제의 전 지지자얐던 위제스 공작부인이 맡게되었다는 것은 이 테러의 원흉을 짐작케 한다. 6월 25일 '무정부주의 프로파간다에 관한 법'의 개정이 표결에 부쳐진다.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이 법안은 표결 결과 반대표는 단 42표로 집계되었다. 장 조레스가 항의하여 재개표가 이루어지고, 찬성표는 반대표보다 단 4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장 조레스가 다시 항의하자 재재개표 결과 단 1표 차이로 법안이 통과되는 것으로 밝혀졌다.[22]

1894년 11월 19일 드레퓌스 장군이 유죄가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결백했음에도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유대주의자들이 그를 반역자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이 시작되었다.

1896년 5월 알렉상드르 밀랑[23]의 주도 하에 여러 사회주의자들이 회동한 생망데 연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정치의 방식을 준수한다는 강령이 채택된다. 이 연회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줄 게드와 폴 라파르그, 블랑키주의자인 에두아르 바이양, 독립파 사회주의[24]인 알렉상드르 밀랑과 르네 비비아니, 가능주의자인 브루스와 사회주의 시장인 드빌 등이 참석했으며, 생디칼리슴적 성향이 강한 알레망파들은 참석하지 않았다.[25]

1898년, 에두아르 바이양은 기존의 CRC를 혁명적 사회당, 일명 PSR로 이름을 바꾸며 장 조레스 등 온건파 사회주의자들과 줄 게드등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위치를 추구하고자 한다.

1898년 1월 12일,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공개 서한을 발표해 이 사건은 부르주아 부르주아 내부의 문제이므로 노동자들은 “도그마와 칼과 자본에 맞서 사회공화국을 위해 단결하고 공개적으로 싸을 것을” 촉구했다.[26] 에두아르 바이양의 PRS와 줄 게드의 POF는 이 사건에 대해 불간섭 원칙을 천명했으나, 장 조레스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믿었다. 그는 초기 드레퓌스파는 아니었고 초기에는 되려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었지만, 나중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그를 위해 싸웠다[27]. 그리고 드레퓌스가 무죄인 근거를 모은 책인 <증거>를 출판하는데, 그의 평소 글쓰기 방식과 달리 다소 난해한 책이었다. 알렉상드르 밀랑, 아리스타드 브리앙, 르네 비비아니 등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언급 자체를 꺼려했으나, 알레망파 만큼은 초기부터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싸워왔다.

이러한 분열이 나타난 이유는 재심 지지와 재심 반대는 어쩌면 명목 같은 것이고,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사회주의에 오래 퍼진 정서이고 더 중요하게는 사회주의의 원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거와 의회와 정당을 좇아 의식이나 조직이나 전환을 해야 하고 그 흐름에 역행할 수 없지만 과연 이것이 사회주의의 목적이며 의의이며 전망인가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 경계심이 프랑스 사회주의에는 깊었던 것이다.[28].

장 조레스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의 계급은 중요치 않고 고통받는 한 인간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9].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첫째, 그는 블랑키주의자들이나 게드주의자들과 달리 파리 코뮌의 경험이 없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일 뿐더러, 그에게 있어 프랑스 공화국은 단순한 부르주아 국가가 아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지닌 공화국이었고, 공화국을 벗어난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1899년 6월, 공화파 정부인 발덱-루소 정부는 사회주의자인 알렉상드르 밀랑을 내각에 입각시킬 것을 제안한다. 당시 사회주의의 두 거두인 장 조레스와 줄 게드 모두 의회에 없었기에 당시 밀랑은 프랑스 사회주의의 대표자 격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내각에는 파리 코뮌을 진압했던 장군인 갈리페 장군 또한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의 부르주아 내각 입각이 적절한 일인가를 두고 장 조레스와 르네 비비아니 등은 옹호했고, 게드, 라파르그, 바이양, 로자 룩셈부르크등은 반대했으며, 그 외 다양한 사회주의 대의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며 분열했다[30]. 결국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밀랑의 입각은 성사되게 된다.

1899년 12월, 프랑스 파리 동북부 볼테르 대로의 자피 체육관에 '자피 프랑스 사회주의조직 전체대회'가 개최되어 800여명의 사회주의 대의원들이 모였다. 프랑스 사회주의는 그 역사가 긴 만큼이나 중구난방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을 제외하고 크게 6개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게드와 라파르그를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블랑키주의자들, 에두아르 바이양을 필두로 한 프랑스 중부 중심의 혁명적 바이양파들, 파리 숙련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생디칼리슴 정파로 장 알레망이 지도자로 있는 알레망파, 당장 가능한 정책 구현을 내세운 의사 출신 폴 브루스 중심의 가능주의(개량주의)자들, 공화국 의 가치를 인정하는 지식인 부류의 신세대 사회주의자들로 일명 독립파 사회주의(혹은 공화파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당시 선거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의 두 거두라 할 수 있는 장 조레스와 줄 게드가 모두 낙선했고, 1893년 POF의 선전과 각개분투로 50명이 당선되었으나 그 이후로 더 의원이 늘지 않던 상황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분열하면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아졌고 신뢰하기 어려웠으며, 서로 싸우기만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앞선 밀랑 입각 사건으로 인한 반목이 발목을 잡아, 통합 논의는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31]

발덱-루소 이후 들어선 강경한 급진사회주의자[32] 에밀 콩브[33]내각은 프랑스에 다시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라이시떼'라 불리는 정교분리법을 제정하여 종교에 타격을 가하고자 하여 우익들의 공격을 받았다. 장 조레스 또한 그를 지지했으나,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개선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논쟁이라며 회의하는 사회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34]

장 조레스는 자신이 의견을 선전하기 위해 1902년 <뤼마니테(L'Humanité)>라는 이름의 신문을 만들었다. '인류'라는 뜻의 이 이름은 인류에 대한 그의 사상이 담긴 이름이었다. 신문의 질적 수준은 높았으나 판매 부수는 높지 못했고 갈수록 적자를 기록했다. 이 신문은 이후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가 된다.

1902년 POSR과 FTSF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자 장 조레스등의 독립파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여 프랑스 사회당, PSF를 창당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줄 게드와 에두아르 바이양은 자신들끼리 프랑스'의' 사회당, PSdF를 창당한다.[34]

1904년 5월 전국사회주의자시의원대회가 열렸고, 에두아르 바이양은 “코뮌의 행동을 통해 사회주의는 모든 곳에서 작동”한다고 웅변하였다.

1904년 8월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6차 대회가 열렸다. 에두아르 바이양과 줄 게드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미리 연락하여 작전을 세웠고, 독일의 베벨이 게드를 지원했다. 그들은 공화파 사회주의자들의 공화국 수호와 정교분리 지원, 부르주아들과의 협력이 공허하며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에 장 조레스는 사회주의는 계급에 기반하지만 계급을 넘어 인류를 위한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암스테르담 대회의 결의안으로 부르주아에 대한 강경한 반대를 표명한 랭스-드레스덴 안이 제시되었고 줄 게드또한 이를 지지했으나, 21대 21의 동수로 기각되었다. 표결은 기각되었지만 공화파 사회주의는 사실상 침몰했다.

의회에 입각한 밀랑의 행보도 문제였다. 그는 권력의 맛을 보고 기회주의적으로 변해갔으며, 장 조레스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진보적이긴 해도 에밍 콩브 내각은 여전히 부르주아 정부라는 점도 문제였다. 이전보단 훨씬 온건하긴 했으나, 콩브 내각 또한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밀랑 또한 이를 방조했기에 사회주의자들은 분노했고 그를 제명할 것를 요구하는 표결이 부쳐졌다. 밀랑 제명 표결은 투표결과 기각되었다.

1905년 4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PSF와 PSdF를 통합하여 노동자인터내셔녈프랑스지부, SFIO를 창설한다. 이 통합은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 아래 줄 게드 등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 주도로 통합되었으며, 이에 아리스타드 브리앙 등 일부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이 반발하여 탈당한다.[35]

SFIO는 당헌에서 집산주의,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사회변혁 표명했으며, 당을 지도하는 것은 당대표나 당수 따위가 아닌[36] 전국당대회라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1906년 총파업 방식에 귀결되었던 프랑스 노동총연맹, CGT[37]가 아미앵 헌장으로 당과 노조의 분리를 선언했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들관 달리 노동조합이 선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못 되었다.[38] 또한 노동운동가들 상당수는 의회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없다며 SFIO를 적대시 했다. 소렐, 에밀 푸제, 라가르델 등이 혁명적 생디칼리슴을 대변했다.[39] 1908년 툴루즈 5차 당대회에서 젊은 생디칼리스트 위베르 라가르델은 조레스를 맹렬히 공격했다. 생디칼리슴은 노동자 다수의 요구는 아니었지만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이 즈음부터 장 조레스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호의적인 견해를 갖기 시작한다.

1907년 인터내셔널 슈르트가르트 대회에서 반전과 관련하여 사회주의자들간에 논쟁이 일었다. 조레스, 바이양 등은 총파업이나 무장봉기등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한다고 본 반면, 게드, 베벨등은 전쟁이 체제 내부의 모순이므로 대응할 필요 없다고 보았다. 논쟁이 결론이 나지 않자 소위원회에 최종 결의안 작성이 넘어가고,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등이 주도하여 전쟁이 발발한다면 노동 계급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내전으로 대응한다는, 전쟁에는 전쟁으로!식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40]

한편 장 조레스는 이 당시 모로코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는 대외 문제에 해박한 사람이 몇 없었는데, 조레스는 여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나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반식민주의, 반전 원칙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41]

1911년, 장 조레스는 '새로운 군'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의회에 제안한 군제 개혁안의 제안 동기를 밝힌 약 400여 페이지의 책으로, 군대의 민병대로의 전환과 사관학교가 아닌 민주적 장교 훈련 등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과거 공화파들의 구상들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반전 계획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이 책은 트로츠키의 군사관에도 영향을 끼친다.[42]

1911년 SFIO를 탈당했던 아리스타드 브리앙, 알렉상드르 밀랑 등이 비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이 공화사회당(PRS)를 창당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브리앙은 SFIO를 탈당했을 뿐 여전히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으나 이때를 기점으로 서로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장 조레스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비밀리에 이뤄지는 교섭을 비판하고 반전에 힘썼으며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들의 반전을 촉구했다. 조레스는 조제프 카이요[43] 연대해 반전을 외쳤다. 반대로 이전에 입각했던 아리스타드 브리앙, 르네 비비아니, 알렉상드르 밀랑은 우익 진영과 연합해 전쟁을 찬성했다.

우익 진영들의 카이요에 대한 비난이 갈수록 강해지던 찰나, 카이요의 부인이 <르 피가로>지의 사장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이요는 사임했다.[44] 전쟁이 점점 가까워지고 카이요와 조레스는 반전을 위해 애쓴다.

1914년 7월 31일, 라울 빌랭이라는 우익 성향의 청년이 조레스를 암살한다. 조레스는 사망했다. 조레스가 사망하자 반전 운동은 중심축을 잃고 무기력해졌으며, 이런 기류는 독일 사회민주당에도 영향을 끼쳤다. SFIO내에서도 소수의 반전파를 제외하고, 장 알레망, 에두아르 바이양, 쥘 게드 등 대다수가 전쟁에 찬성한다. 심지어 조레스의 아들마저 전쟁에 참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 임시 저장

개요

막시밀리앙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 일명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태생의 혁명가이자 공화주의자로, 프랑스 혁명에서 자코뱅파의 산악파의 수장으로써 공포정치를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상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자로, 과거 장 자크 루소와의 만남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민중의 정치적 권리만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자 및 입헌군주주의자였으나, 이후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혁명의 사회적 성격을 깨닫고 민중의 사회적 권리를 옹호하는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모든 사람이 자신이 경작할 땅을 지니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방토즈 법 등 체계적인 분배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생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 시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에 '드'가 들어갔으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가출하여 가난하게 자랐으며, 어릴 때 장 자크 루소를 만나 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장학금을 받으며 소르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 시기 좋은 성적 덕에 루이 16세 앞에서 글을 낭독할 기회를 얻었으나 그에게 무시받았다. 이 시기 그는 가난하여 외벌신사로 지냈으며, 귀족 출신 학생들에게 무시받아 교우관계는 좋지 못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에게 장학금을 물려주고 졸업한다.

졸업하고 아라스에서 변호사 일을 했으며 이 시기 문학 아카데미에 선출되었으며, 그의 특유의 낭만적인 문체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판사직도 맡았었으나 피고에게 사형을 내려야 하는 자신의 책무에 갈등하다 판사직을 사임한다.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될 당시 아르투아의 제3신분 대표로 선출되었다.

영향

바뵈프가 최초의 사회주의를 창시할 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맑스의 혁명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좌파 교과서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답변

역사

경제

철학

이념별 정세관

의제

실천론

  1. 프랑스 제3공화국의 건국자로, 온건한 왕정주의자였으나, 이후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공화국을 수립하려 노력함.
  2. 프랑스 정치세력의 형성과 정치체계의 변화, 이종광
  3. 프랑스의 열정-공화국과 공화주의, 한국프랑스사학회
  4. 프랑스 사회주의 시정의 탄생-시정사회주의 논쟁에서 통합사회당의 시정프로그램까지, 민유기
  5. 가능주의(개량주의)적인 프랑스의 사회주의 분파. 폴 브루스를 수장으로 함
  6.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파리 코뮌으로 인해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임.
  7.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본래 블랑키주의자였으나 추후 장 조레스와 줄 게드의 사이의 사회주의를 추구함.
  8.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마르크스의 사위
  9. 프랑스 노동 조합운동의 태동과 도시 공동체 - 직능별 조직과 지역별 연대의 길항 관계의 역사적 기원, 신동규
  10. 장 조레스 그의 삶, 막스 갈로
  11. 프랑스 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가를 추종하는 파벌, 출처: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노명식
  12. 6월 혁명으로 세워진 입헌군주주의적 왕정이었던 오를레앙 왕가를 추종하는 파벌
  1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왕가를 추종하는 파벌
  14. 우익 세력을 자극할지 모르는 사회개혁에 대해 소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이던 공화파
  15. 자코뱅의 후예들로, 사회개혁과 정교분리를 강경하게 추구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공화파들
  16. 계급 이념과 정치 현장 : 장 조레스의 사례(1892 - 1910) 67-68p, 노서경
  17. 장 조레스 그의 삶, 막스 갈로 82-119p
  18. 장 알레망을 중심으로 하는 생디칼리슴 성향의 파벌
  19. 장 조레스 그의 삶, 막스 갈로 120-171p
  20. 프랑스 사회주의자 시의원 연맹 규약 2조
  21. 프랑스 사회주의 시정의 탄생-시정사회주의 논쟁에서 통합사회당의 시정프로그램까지 201-202p, 민유기
  22. 장 조레스 그의 삶, 막스 갈로 189-197p
  23. 급진공화파로 정계에 들어와 곧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1899년 입각했으나, 이후 변절함
  24. 장 조레스가 속한 파벌로써, 공화주의와 공화국을 저버리지 않으며 정치적 연속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신세대 사회주의자들
  25. 계급 이념과 정치 현장 : 장 조레스의 사례(1892 - 1910) 64-65p, 노서경
  26. 조레스의 드레퓌스사건 개입의 이유와 의미, 1898년 1월~1899년 6월 115p, 노서경
  27. 공화국과 사회주의(1898-1914)-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138p, 노서경
  28. 공화국과 사회주의(1898-1914)-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137p, 노서경
  29. 사회주의와 자유, 장 조레스
  30. 공화국과 사회주의(1898-1914)-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136-137p, 노서경
  31. 공화국과 사회주의(1898-1914)-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134-136p, 노서경
  32. 급진사회주의는 이름과는 달리 사회주의가 아닌 급진공화파 내의 좌익 강경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프랑스의 열정, 공화국과 공화주의>참고
  33. 프랑스의 급진공화파 총리로써, 급진당 내에서도 강경하기로 유명했다. 임기동안 정교분리법을 제정하고 일 10시간 노동, 광부 한정 8시간 노동법을 제정하는 등 진보적인 사회개혁들을 단행했으나 종교계, 우익들과 마찰을 빚었고, 프리메이슨과 관련한 스캔들로 사퇴한다. 그가 사망하자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두고 "최후의 민주주의적 부르주아"라며 안타까워했다.
  34. 34.0 34.1 장 조레스 그의 삶 443-459p, 막스 갈로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출처20"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35. 공화국과 사회주의(1898-1914)-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136-137p, 노서경
  36. 당수나 당대표 혹은 그런 역할을 하는 소수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37. 1895년 창당된 프랑스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혁명적 생디칼리슴성향이었다.
  38. 프랑스 사회당(SFIO)전국당대회(1905-1914) - 연구의 기초로 ‘연맹’에 관심을 두고 240p, 노서경
  39. 공화국과 사회주의(1898-1914)-장 조레스의 이념과 현실 148-149p, 노서경
  40. 맑스주의 역사강의, 한형식
  41. 조레스의 반전(反戰)과 프롤레타리아 -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회에 주목하여 55-58p, 노서경
  42. 조레스의 반전(反戰)과 프롤레타리아 -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회에 주목하여 58-62p, 노서경
  43. 프랑스의 급진공화파 정치인으로, 초기부터 누진세 도입에 힘써왔었다. 이후 조레스와 함께 반전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이후 반전을 외쳤다는 이유로 프랑스 총리인 조르주 클레망소에 의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망명했다. 전후 프랑스로 돌아와 경제장관직을 맡았으나, 과거보다 상당히 우경화하였다.
  44. 장 조레스, 그의 삶 720-723p, 막스 갈로